회화의 (지적)양가성 - 그리다 다시 보기
‘이응’과 단추는 등가(等價)다
김일지의 2018 신작을 중심으로
글쓴이: 김은지 교수(홍익대학교, 철학박사/미술사)
흔적: 회화의 기술적 본질
‘그린다’는 것은 흔적에 관한 것이다. 형이하학적 의미의 질료가 남긴 흔적 즉 색과 붓질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회화의 기법적 본질이다. 흔적은 흔히 색들이 켜켜이 쌓여진 결과로 이해된다. 회화의 오랜 기법적 통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다는 과정을 통해 남겨진 흔적은 색인 질료를 겹겹이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올려진 색을 긁어내거나 떼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린다의 흔적이란 색을 겹겹이 올리고 동시에 지워 없애며 남겨지는 것이기에 양가성(ambivalence)을 지닌다. 따라서 흔적은 그린다의 결과인 동시에 회화의 기법적 본질이며, 양가성은 회화의 기법적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김일지의 신 작품들이 흥미로운 것은 회화의 이 (기법적)양가성을 이중으로 재 고찰해내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에 색-마스킹 플루이드 혹은 테이프-색의 순서대로 겹겹이 층을 그려 올린 후, 색이 마르면 마스킹 플루이드를 떼어낸다. 김일지의 캔버스 위 겹겹이 칠해 올려진 색은 결국 떼어내 지기 위함으로, 색을 떼어내며 지워내며 그려내는 과정은 곧 흔적의 완성이 된다. 그래서 뜯겨져 나간 것 즉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은 동일한 것이 된다. 이렇게 회화의 기법적 본질인 흔적에 몰두하며 김일지는 그린다의 양가성을 붓질과 색을 통해 그리며 지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그 만의 독특한 조형적 전략을 구현해 나간다. 나아가 김일지는 신작 “이응-회화”-시리즈에서 이 회화의 기법적 본질인 흔적의 양가성을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상호작용적 알레고리화로 이끌어내며 그 의미를 배가(倍加) 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작품을 예의주시 하게하는 요소이다.
이응과 단추: 양가성과 상호작용의 알레고리
한글의 자음 “ㅇ(이응)”은 모음 앞에서는 묵음이다. 하지만 자음 뒤의 받침 일 경우는 “잉(-ing)”으로 발음된다 (예: 항아리). 즉 ‘ㅇ’은 어떤 위치에서는 (기표로만) 존재하지만, 또 어떤 위치에서는 기표와 기의라는 언어적 기능을 다 해낸다. ‘이응’은 무음인 동시에 소리음이다. 없는 듯하지만 존재의 역할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이응’의 양가성이다. 여기서 주목 할 부분은 상호간의 작용 즉 상호관계와 상황 그리고 그 가치이다. 허셀(Edmund Husserl, 1959-1938)은 살아서 행동하는 이 (현대)사회와 세상에는 ‘단일적’ 인 것 또한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피력했다. 이것은 상호작용에 대한 의미로 G. 짐멜과 M. 바흐친의 이론적 맥을 잇는다.
‘상호작용’이라는 용어를 사회학적 의미로 승화시킨 독일의 사회 철학자인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근본적인 불변의 가치란 여러 요소들의 실질적인 상호작용”이라했다. 짐멜의 현상학적 사회학의 계보에서 러시아의 문화 이론가이자 철학가인 미하일 바흐친(Michail Bachtin, 1895-1975)은 ‘격리(isolation)와 스스로 폐쇄(In-self-closed)’ 간의 극복을 지적하며 동등한 의식 간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단독으로 머물되 서로 침투하지 않으면서 또 서로 병합/섞이지 않는 ‘특별한’ 상호작용에 대한 가치도 강조했다. 이는 앞서 언급된 허셀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단일’이 불가능함에 대한 설명이다.
김일지의 신작에는 이러한 특별한 상호작용이 ‘ㅇ(이응)’으로 제시된다. 그의 돋보이는 창의적인 발상은 ‘이응’에서 “단추와 단추 구멍”으로의 연계와 확장에 있다. 기능과 역할이라는 구조적인 의미에서 단추는 단추 구멍에 의해 봉합이라는 주어진 기능과 역할을 다해내고, 존재의 의미를 더한다. 동시에 단추 구멍은 단추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 의미가 더 부각된다. 앞 선 ‘이응’의 양가성은 ‘단추와 단추 구멍’ 간의 상호작용으로 확대되며, 김일지의 작품은 조형적으로는 2D(평면)에서 3D(입체)로의 전환을 이룬다.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양가성, 상호 관계와 상호작용의 의미 및 가치를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재고찰 하게한다. 이는 창작자의 오랜 고민과 숙고에 의한 이중의(dual) 가치에 대한 현시대적 해석이기도 하다.
또한 김일지 만의 ‘이응-단추-사회’가 제시하는 기능과 역할에 대한 알레고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 이은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 1950-1990)가 피력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만연하는 ‘절대적 가치’나 ‘불멸의 진리’의 부재에 대한 시각적 표현의 완성으로도 여겨지게 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E. 블로일러(Eugen Bleuler, 1898-1927)가 <양가성에 대한 소고>에서 분류한 세 번째의 양가성-‘상호 모순되는 전제를 모두 받아들이는 지적 (양가성)측면’에서 김일지의 ‘이응’과 ‘단추’는 현시대적 상호작용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김일지의 ‘이응’과 ‘단추’의 등가가 내포한 상호작용과 양가성은 앞으로 어떻게 흔적이라는 그리다의 본질을 더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또 더 창의적인 의미 확장으로 전개될지 기대하게 한다. 이는 결코 과장된 기다림이 아닐 것이다.
끝.